1장. 어머니의 방
엘리사는 오래된 나폴리의 골목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방은 늘 바다 소리로 가득 찼고, 창문 밖엔 녹슨 철제 발코니와 빨래가 나부끼는 풍경이 일상이었다. 어머니는 오르간 연주자였고, 엘리사에게 매일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 방 안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악보들엔 기이한 표식들이 그려져 있었고, 어떤 악보는 종이 끝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이건 치면 안 돼, 엘리사. 이 곡은… 너를 데려가 버릴 거야.”
어머니의 말은 경고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유혹이었다. 엘리사는 어린 마음에 그 곡들이 어떤 세계를 열어줄지 상상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어머니가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들린 건 거칠게 끊긴 오르간 소리. 그 이후, 피아노는 침묵했고 엘리사는 어머니의 방을 잠갔다. 누구도 다시는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2장. 그림자의 성찬
엘리사는 어른이 되었다. 음악원에서는 그녀를 ‘나폴리의 음유시인’이라 불렀다. 그녀의 연주는 듣는 사람의 시간을 멈추는 것 같았고, 때론 기억을 되살리는 효과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점점 말라갔다. 손가락 끝은 하얗게 변했고, 머리카락은 바다빛으로 퇴색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폐쇄된 나폴리의 오래된 지하 철도에서 피아노 콘서트를 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도시는 이미 오래전부터 어두운 소문에 휩싸여 있었고, 그 지하에는 ‘페라타 블루’라는 이름의 유령 열차가 있다고 믿어졌다.
엘리사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콘서트 당일, 무대는 한 칸의 낡은 객차였다. 객석엔 아무도 없었지만, 엘리사는 연주를 시작했다.
곡이 진행되자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전구가 깜빡였고, 빈 좌석에 하나둘씩 형체가 앉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얼굴이 없었고, 손에는 과거의 나폴리 기차표를 쥐고 있었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연주했다.
‘Il Lato Inverso’—거울의 반대편에서 온 곡.
어릴 적 어머니가 연주를 금지했던 바로 그 곡이었다.
3장. 반사된 여왕
엘리사는 점점 페라타 블루와 동일화되어 갔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해갔고, 말을 할수록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녀는 자신이 연주할 때마다 어딘가에서 죽은 자들이 되살아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Il Lato Inverso로부터 엘리사를 통해 현실로 흘러들어왔다.
“왕은 아직 잠들어 있으나, 그의 신부는 깨어 있다.”
면사포를 쓴 여인의 음성은 이제 엘리사의 내면에서 속삭였다. 마치 그 여인의 혼이 그녀 안으로 들어온 듯했다. 그녀는 점차 거울 속의 자아와 이질적인 감각을 느꼈다. 거울 속의 자신은 웃고 있었지만, 진짜 엘리사는 울고 있었다.
하루는 시청 광장 한복판에서 의문의 피아노 소리가 울렸다. 아무도 피아노를 치지 않았지만, 소리는 공기를 찢으며 도시 전역에 퍼졌다. 수십 명이 쓰러졌고, 병원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혼수 상태가 이어졌다.
엘리사는 자신이 불러낸 자들이 이제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식객들은 그녀를 왕비라 불렀지만, 그녀는 더 이상 열쇠가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문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네가 존재하는 한, 나폴리는 잠들지 않는다.”
그 말을 끝으로, 엘리사는 완전히 Il Lato Inverso로 끌려갔다.
4장. 입맞춤의 대관식
도시는 변해갔다. 해안선을 따라 세워진 나폴리의 고딕 양식 건물들은 검게 그을렸고, 모든 종은 침묵했다. 교회의 종소리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고, 시체가 된 시간 위로 그림자들이 춤을 췄다.
페라타 블루는 이제 나폴리 대성당 한가운데에 세워졌고, 피아노 위엔 엘리사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텅 비었고, 손은 자동인형처럼 건반을 두드렸다. 음악은 사람들의 뇌를 녹이고, 피를 얼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광기에 물들어 서로를 물어뜯었고, 거리는 피로 덮였다. 도시 전체가 Il Lato Inverso와 중첩되며 하나가 되어갔다. 나폴리는 이제 살아 있는 도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하나의 악보가 되어 연주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곡.
“Coronatio Obscura – 어둠의 대관식”
악보는 절대 연주되어선 안 되는 금지곡이었다. 하지만 엘리사의 손은 주저하지 않았다.
음 하나, 둘.
도시는 조용해졌고, 하늘은 붉게 갈라졌다. 바다에서 솟아오른 그림자 같은 형상이 나폴리 만을 삼켜버렸다. 그것은 왕이었다.
그 존재는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눈과 입이 없었고, 온몸이 피아노의 현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는 깨어났다. 그리고 너는 나의 왕비다.”
엘리사는 웃으며 피아노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은 이제 면사포 뒤의 여인과 똑같았다.
왕은 나폴리 대성당을 통째로 집어삼키며 도시의 중심에 앉았다. 도시 사람들은 왕의 입속으로 하나씩 빨려 들어갔고, 그 입은 바로 “나폴리의 입”이었다.
5장. 침묵의 음
수백 년이 흘렀다. 나폴리는 지도에서 사라졌다. 공식적으로는 대지진, 해일, 화산 폭발의 복합 재난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침몰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바다 깊은 곳, 한 송이 피아노 음이 가끔 울린다. 잠수부들이 가장 깊은 바다 밑에서 들었다는 음악.
그것은 엘리사가 연주한 마지막 곡. 아직도 연주되고 있는, 살아 있는 피아노의 선율이었다.
그리고, 사람들 중 일부는 밤에 나폴리를 꿈꾼다. 실제로 가본 적도 없는 그 도시를. 그들은 그 꿈에서 언제나 똑같은 장면을 본다고 한다.
검은 면사포를 쓴 소녀가, 피아노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말한다.
“너도 듣고 싶니? 나의 마지막 입맞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