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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탄] 그 곳은 원래부터 없었어

1편. 그 방은 원래 없었어요

나는 올해 3월, 지방 국립대 기숙사에 처음 입사했다. 혼자 살아본 적이 없어서 약간 긴장했지만, 새로 지어진 기숙사라 시설도 깔끔하고 방음도 잘 된다는 말에 안심했다.
내 방은 207호였다. 복도 끝에서 세 번째 방.

처음 이사 들어갔을 때부터 이상한 기분이 들긴 했다. 207호와 209호 사이의 복도 간격이 묘하게 길었다. 다른 층의 구조도 거의 똑같은데, 2층만 유독 그랬다.
혹시 208호가 있는데, 문을 막아놨나 싶어 복도 벽을 두드려보기도 했는데 그냥 시멘트 벽이었다.

그냥 설계 미스겠지, 하고 넘겼다.

그 일이 일어난 건 입사한 지 3주쯤 지났을 때였다.
새벽 3시, 나는 물을 마시러 방을 나섰다가 207호 문을 닫기 직전에, 이상한 걸 들었다.

“…살려줘…”

너무 작아서 환청인 줄 알았는데, 다시.

“…여기… 사람 있어요…”

그 소리는 내 방 벽, 그러니까 207호와 209호 사이, 아무것도 없는 그 벽 안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소름이 돋아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내 등 뒤쪽—209호 쪽 문이 벌컥 열렸다.

남자 한 명이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봤다.
“뭐 하세요?”
“…아, 죄송해요. 그냥 소리가 나서…”
“어우… 그쪽 방 사는 사람들 이상하네. 지난 학기에도 그 방 애가 새벽마다 벽 두드려서, 신고도 들어가고 난리였는데.”

그가 들어가고 나서도 나는 한참 그 벽을 바라보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난 이상한 꿈을 꿨다.
내가 누군가에게 끌려서 그 복도 벽 안, 시멘트 뒤편으로 끌려 들어가는 꿈. 어두컴컴한 복도에 누군가가 등을 돌리고 서 있었고, 그 사람은 천천히 고개만 돌려 나를 봤다.

그 눈동자가 이상하게 거울처럼 빛나고 있었다.

다음 날, 나는 사감 선생님께 물어봤다.
“혹시… 여쭤볼 게 있는데요. 208호는 왜 없어요?”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대답했다.
“208호요? 거긴 없어요. 원래 설계상 없어요.”
“근데… 벽 간격이 너무 이상해서요. 거기에 방이 하나 더 들어가도 될 정도로 넓어서요.”
그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학생, 그런 질문 말고 공부 열심히 하세요.”

그날 이후로, 매일 새벽 3시만 되면 벽 너머에서 낯선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말소리였고, 그다음엔 긁는 소리.
그리고 며칠 뒤에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문을… 열어줘요… 춥고… 어두워요…”

나는 녹음도 해보고, 옆방에도 들어가 봤지만 소리는 벽 사이에서만 들렸다.

그래서 결국, 나는 CCTV를 보기로 했다. 기숙사 복도 CCTV는 학과 조교 선배가 관리하는데, 선배에게 사정사정해서 지난 며칠간의 새벽 3시 근방 영상을 받아왔다.

그리고 확인한 그 순간, 나는 식은땀이 났다.

영상에서, 내 방 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긴 생머리의 여자가, 매일 같은 시각, 같은 자세로 207호 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서 있기만 했다.

그 다음 날부터 나는 기숙사를 나왔다. 방도 빼고, 학교도 휴학했다.
지금은 서울에 있는 친척 집에 얹혀 살고 있다.

그리고… 어제. 기숙사에서 같은 층에 살던 후배가 내게 연락을 해왔다.
“형, 기숙사 방 구조 이상하지 않았어요?”
“…왜?”
“그게요… 어제 새로 들어온 룸메가 그러는데, 207호랑 209호 사이에… 208호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고 해요. 거기 누가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후배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 방 원래부터 있었던 거 아니었어요?”

2. 이름을 말하면 안 되는 방

민경은 교직원이었다. 지방 국립대에서 행정 업무를 맡은 지 4년 차. 업무는 단순했고, 조용했고, 이따금 복사기 앞에서 잠들 수 있을 만큼 평온했다.

어느 날, 익숙한 메일 정리 중 이상한 파일 하나가 도착했다.
보낸 사람: [알 수 없음]
제목: “208호 사망자 보고 – 수정 요청”
첨부 파일: 208호_입주자_정정신고서.xlsx

처음엔 단순한 해프닝이라 생각했다.
208호? 그 기숙사에 그런 방은 없다.
확인해 보니, 기숙사 호실 리스트에도 208호는 없었다.

그런데 희한한 건, 보고서 내용이었다.
파일 안에는 이름도 얼굴도 생년월일도 뚜렷하게 기록된 사람이 적혀 있었고, 비고란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망 추정일: 2021.09.23
원인: 알 수 없음
발견 장소: 208호 침대 아래
추가사항: 본인은 해당 호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음”

민경은 처음 보는 이름이었고, 관련 정보도 없었다. 그 순간,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혹시, 방금 이상한 메일 받지 않으셨어요?”
문 앞에는 입주 담당 RA 학생이 서 있었다.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저도 208호 관련 파일 받았어요… 근데, 그게요… 방금 그 방을 실제로 봤어요.”
민경은 그를 데리고 바로 기숙사로 향했다. 2층으로 올라가던 중, 그 학생은 수전증처럼 손을 떨며 말했다.

“209호 쪽에 새로 페인트칠된 벽 있죠? 거기 문 열려 있었어요. 안에 침대랑 책상도 있었고, 진짜 누가 살았던 흔적도 있고… 근데요, 이상한 게…”
“뭐요?”
“…책상 위에 제 이름이 적혀 있었어요.”

민경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당신 이름이 적혀 있다고요?”
“네. 제 학번이랑 생년월일까지요. 그런데, 그 옆에… 이렇게 써 있더라고요.
‘넌 여기서 죽기로 되어 있었다.’

그 순간, 둘은 기숙사 사감에게 안내를 받으며 2층으로 향했다.
사감은 이상하다는 듯 웃었다.
“208호요? 에이, 거긴 창고로 막혀 있는데요.”

하지만 도착했을 때, 거기엔 아무런 벽도 없었다.
대신, 문이 있었다. 번호표가 붙은 진짜 문.
208호.

사감이 말을 잇지 못한 채 물러섰다.
RA 학생이 주저하다 문고리를 잡았을 때, 민경은 갑자기 끔찍한 두통을 느꼈다.
짧은 현기증. 그리고, 한 줄기 이미지.
누군가가 방 안에서 기어 나오는 모습.
몸은 사람이지만, 얼굴은 지워져 있었다.

문이 열렸다.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날 이후, 민경은 며칠 동안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한밤중에 누가 자신의 이름을 계속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이메일함엔 같은 파일이 반복적으로 도착했다.
“208호_입주자_정정신고서.xlsx”
매번 파일 속 이름만 조금씩 바뀌었다.

그리고 오늘, 파일을 열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학번과 생년월일, 주소, 그리고 아래에 이런 문장이 추가되어 있었다.

“입주자 본인은 해당 호실의 존재를 ‘기억했다’.”

그 순간, 노트북 화면이 꺼졌다.
불이 깜빡였고, 사무실 창밖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민경은 누가 오는 걸 느꼈다.

그걸 알아챘을 때, 그녀는 떠올렸다.
4년 전, 처음 이 학교에 발령받았을 때—기숙사에 배정받았던 그 방의 호실.

208호였다.

3. 비우기 전에 다시 채워진다

“민경 씨? 민경 씨 괜찮으세요?”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민경은 눈을 떴다.
어깨를 흔드는 건 기숙사 사감이었다. 그녀는 책상 앞에서 잠든 듯 보였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창밖은 깜깜했고, 시간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리고, 방 안 구조가… 기억과 달랐다. 책상 위치, 침대 위치, 벽 색깔. 전부.

“…여기, 어디에요?”

“기숙사 208호죠. 여기 배정받은 거 기억 안 나세요?”

민경은 순간, 뒷목이 서늘해졌다.
“여기… 없었던 방이잖아요. 208호는—”

“없던 게 아니라, 당신이 없다고 계속 믿었던 거겠죠.”
사감은 그렇게 말하며 어딘가 이상한 웃음을 지었다.
“그 방이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 특징이 있어요. 기억이, 끊겨요. 마치 누가 일부러 지운 것처럼요.”

사감은 방을 나갔고, 민경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파일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익숙한 제목이었다.

208호_입주자_정정신고서.xlsx

하지만 이번엔… 열 수 없었다.
파일을 클릭하면 화면은 검은색으로 바뀌고, 한 문장만 깜빡였다.

“당신은 여기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 다시 존재하게 될 겁니다.”

그때부터 방이 변했다.
진짜로. 물리적으로.
방 구조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침대 위치가 조금 이동해 있고,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미세하게 달랐고, 옷장 안엔 자신이 본 적 없는 옷들이 걸려 있었다.

어느 날은 벽에 스스로 새겨진 글귀를 보았다.

“나는 여기에 있었다.”
“나는 여기에 있었다.”
“나는 여기에 있었다.”

그날 밤, 민경은 결심했다.
파일을 삭제하고, 방을 비우자.
이 방에서 완전히 나가버리면, 이 악몽도 끝날 것이다.

짐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노트북을 켜 파일을 지웠다.
휴지통을 비우는 순간, 전기가 나갔다.
노트북도, 조명도, 핸드폰도.
모든 게 꺼졌다.

그리고, 바닥에서 ‘툭’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민경이 고개를 돌리자, 벽 한쪽에서 벗겨진 페인트 틈 사이로 누군가의 손가락이 튀어나왔다.
그 손가락은 천천히 벽을 긁기 시작했다.

긁적—긁적—

거기엔 새로 새겨진 문장이 생기고 있었다.
민경은 그걸 알아볼 수 있었다.

“파일을 삭제했으므로
당신은 기억을 되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컴퓨터가 다시 켜졌다.
파일은 복원되어 있었다.
더 무서운 건, 이번엔 제목이 바뀌어 있었다.

208호_입주자_기억복원보고서_최종본.xlsx

민경은 그 안을 열었다.
파일엔 이제 하나의 이름만 남아 있었다.

이름: 김민경
상태: 정상화 완료
기억 오염도: 0%
다음 입주자: 할당 예정

그리고 마지막 셀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방은 비워지지 않는다.”
“당신은 단지 자리를 바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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